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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이미 ODOMETER가 있었다
DATE 12-05-25 10:27
글쓴이 : 이차봉      
시골에서 태어난 나는 방학이 끝나고 공부하던 도시로 갈 때면 신새벽부터 일어나 서둘러야 했다. 10여 리를 걸어서 하루 한 번밖에 운행하지 않는 완행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먹을 쌀이며 반찬거리들을 담은 무거운 짐을 지고 10여 리 산길을 걸어가는 것은 여간한 고역이 아니었다.
자동차 문화가 발달한 요즈음 10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 나에게 10리라는 거리는 엄청난 거리였다. 그 이후로 그 거리가 나에게는 거리를 재는 기준이 되었고 10리는 상당히 먼 거리로 뇌리에 각인이 되었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오고 자동차 여행이 일상이 되면서 거리에 대한 감각이 다소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당시에는 장거리 여행을 준비하려면 지도를 펴 놓고 방향과 대략의 거리를 가늠해 본 후 지도 옆에 있는 색인표의 가로 세로를 맞추어서 총 거리를 산출하고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서 일정을 잡곤 했었다.
지금이야 인터넷 지도에 연결하면 거리와 소요 시간을 금방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GPS를 이용하면 그저 몇 번의 클릭으로 원하는 방향과 걸리는 시간을 음성으로까지 안내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과학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했다. 우리 조상들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우리나라를 삼천리라고 했을까?
김정호는 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서 우리나라의 남북을 2,640리로 표기했고, 이보다 먼저 제작한 <청구도>에는 2,900리로 표기하고 있어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청구도>에서 공백 및 여백으로 표시한 부분을 <대동여지도>에서는 생략하였기 때문에 생긴 차이로 본다면 남북한을 3천 리로 보는 것에 별 무리는 없다.
오늘날 계량 단위로 보아도 3천 리면 대략 1,200km인데 남북을 합치면 이 정도의 거리가 되기 때문에 근거 없이 붙인 명칭은 아닌 듯하다.
그러면 요즈음과 같이 과학의 힘을 빌릴 수 없었던 그 시대에 어떻게 거리를 잴 수 있었을까?
세종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세종 23년(1441년) 3월 17일, 왕과 왕비가 온수현으로 가니 왕세자가 함께 따라갔다. 종친과 문무 군신 50여 명이 동행하였고, 임영대군 이구, 한남군 이어에게는 궁궐을 지키게 했다. 이 행차에 처음 초여(풀 줄기를 엮어서 만든 가마)를 쓰고 기리고(記里鼓)를 사용하니 수레가 1리를 가게 되면 목인(木人)이 스스로 북을 쳤다.”
여기서 온수현은 지금의 온양으로 세종은 왕비, 세자와 더불어 온천에 행차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기리고’라는 수레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기리고에는 1리를 가면 나무 인형이 나와 스스로 북을 치는 장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차한 거리는 그저 이 수레를 타고 가다가 북을 친 횟수만 따져 보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기리고차는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일까? 기리고차는 구르는 바퀴의 둘레를 이용했다. 즉, 바퀴의 둘레를 1리의 백 분의 1로 만들고 바퀴가 1백 바퀴를 돌면 1리를 알리는 북을 치게 한 것이다.
바퀴가 굴러 한 바퀴가 될 때마다 바퀴와 이어진 톱니바퀴가 한 칸을 가게 되고, 이 톱니바퀴가 백 번을 움직이면 저절로 나무 인형이 나와 북을 치게 만든 것이다.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발상이 대단히 멋진 자동 기계였던 셈이다.
고대 이래로 거리나 길이를 재는 척도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척도를 차용해 사용해 오다가 1430년,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우리의 실정에 맞게 정확한 표준척을 새로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시행하게 했는데, 그가 온양 온천에 가면서 기리고차를 타고 간 것은 새로운 척도와 새로운 거리 측정 기계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1리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10리를 4km로 알고 있지만, 이는 일제 시대 일본의 거리 단위가 도입된 이후의 일이고, 19세기 후반 즉,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지던 당시의 10리는 오늘날의 거리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당시의 10리를 오늘날의 거리 개념으로는 환산하는 데에는 몇 가지 관점이 있다. 약 3.74km로 보는 견해와 약 4.2~4.6km로 보는 견해, 그리고 5.4km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거리 단위를 밝히는 것이 이 글의 주안점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를 보기로 하고 대충 10리를 4km로 계산해 보면 1리는 약 400m가 되고 100바퀴를 굴러야 1리를 가는 것이니 바퀴의 둘레는 약 4m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세종이 타고 간 기리고차의 크기를 추측해 보면 바퀴의 둘레가 약 4m, 지름이 약 127.39cm 정도가 되어 오늘날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보다 다소 크고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 있는 주행 거리계(odometer)도 이 기리고차의 원리와 대동소이하다.
자동차에 주행 거리계가 장착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포드 자동차 회사가 설립된 것이 1903년인 것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나 지식이 이미 400년 전에 수레의 바퀴를 이용해서 이동 거리를 계산해 낼 생각을 한 조상들의 지혜에 비해서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 다만 후대에 태어난 덕분에 그저 누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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