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분명하게 의식하면, 자아의 또 다른 영역인 의지가 이전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예배이다. 특히 ‘영광’의 과정에 도달한 자아의 사고는 하나님이 영생한다는 사실을 깊이 있게 깨닫게 된다. 이처럼 사고가 하나님의 영생을 의식하게 되면서, 이에 영향을 받은 의지가 색다른 방법으로 반응을 하기 시작한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에 한 번도 상상해 본적이 없던 뜻밖의 선택이다. 솔직히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옛 자아가 하나님을 경배하리라 스스로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일단 사고가 하나님의 영생을 강력하게 의식하게 되면, 자아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예배이다. 그 이유는 인류가 본래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들을 깊이 깨닫게 되면 자아는 항상 고개가 숙여지며 예배하는 마음이 동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자아가 하나님의 참 모습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더욱 예배하고 싶어 한다.
왜 자아는 예배를 원하는 것일까? 내면에서 일어난 하나님과의 만남(연합)이라면, 혼자서 조용하게 내면의 하나님께 예배할 것이지, 굳이 밖으로 예배를 표현하려는 것일까? 그것도 공동체로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것일까? 이와 같은 질문은 근래에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던지는 물음이다. 집에서 혼자서 예배드릴 수 있는데, 번거롭게 예배장소까지 가야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인터넷을 통해서 혼자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함께 모여 예배드릴 것을 조언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자아 안으로 유입된 것을 경험한 자아는 틀림없이 자아 외부에 존재하는 하나님 그분 실체를 만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물론 믿음의 과정에서 자아 안으로 임재하신 하나님도 진짜 하나님이며, 하나님과 형성한 연합의식도 진짜이다. 그러나 이때는 개개인의 형편에 따라서 내면의 하나님을 개별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각 개인의 지정의의 상태와 외부의 형편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자아는 외부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원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게 되어있다. 즉, 자아 밖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실체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 앞서 사용한 예와 같이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이 편지(성경)를 통해서 아버지를 경험했을지라도, 더욱 더 아버지를 직접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닌가?
또 다른 이유는 모든 자아가 동일하게 ‘터진 웅덩이’, 하나님의 영이 빠져나간 빈공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James Fadiman & Robert Frager, Personality & Personal Growth, p. 92-93 칼융은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칼융은 천재적인 학자이다.) 이 웅덩이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자아 안에 동일하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며, 자아는 일평생 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예배란, 자아가 웅덩이를 채울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며 장소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최적의 상태로 준비되어져 있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는 수 천년에 걸쳐서 다양한 예식과 방법들로 발전되어온 것이 예배이다. 동시에 인류가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금까지 형성해온 형식과 이미지가 바로 현재 예배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처럼 오랬 동안 다양한 예식의 예배가 형성되어 왔고 점차 발전해 왔지만, 예배 안에는 변치 않는 원형(기본형식)이 항상 존재해 왔다. 바로 이 원형은, 자아의 무의식(터진 웅덩이)속에 숨겨져 있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가장 원초적인 모습으로 예배 속에 표현된 것들이다.(칼융은 원형(Archetype)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자아가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 자신의 무의식에 숨겨져 있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큰 어려움 없이 표면화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예배 안의 형식과 내용들이 자아 무의식을 자극하게 되고, 잊힌 부분을 불러 깨우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유는, 예배 가운데 임재 하는 하나님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나누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개인적 사정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하기 힘든 자아였을지라도,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을 목격하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예배 가운데 임재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일단 한번 하나님의 실체를 경험하게 되면 자아의 회복과정에 큰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느슨해졌던 회복이 힘을 얻게 되고, 멈춰선 회복이 다시 움직이게 된다. 심어는 회복자체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자아가 순식간에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되는 일도 발생한다. 종종 이와 같은 극적인 구원도 목격하게 된다. 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면에서부터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하나님의 실체를 한순간 직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때 자아가 경험하는 회개는 매우 극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예배는 아주 폭넓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자아의 모든 반응이 예배에 포함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묵상이다. 묵상은 가장 조용하고 비밀한 예배의 모습이다. 묵상은 의식된 하나님의 모습을 자아가 의지적으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가지고 내려가는 행위이다. 그렇게 함으로 영혼 깊은 곳 안에서 사고하고 느끼고 예배하는 것이다. 묵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통의 경우 조용하고 얌전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의지가 반응해야 하는 경우에도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최대한 절제하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대표적인 예배의 방법은 찬양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고 알리는 예배의 한 모습이다. 찬양은 의식된 하나님의 모습을 자아가 의지적으로 자신의 외부로 표현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잘 드러나기를 원한다. 찬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통의 경우 사교적이고 활동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기독교가 행하는 예배의 형식에는 앞에서 언급한 묵상과 찬양 뿐 아니라, 그 외의 다양한 예배 모습이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축제의 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독교의 예배 형식 안에는 설교가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다. 설교라 함은 성경이 읽혀지고 거기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지는 행위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자아의 사고 영역에 주입되는 행위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원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참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동안 조용히 앉아서 그것을 묵상한다. 마지막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시간도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예배의 형식이다.
놀라운 점은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회복장치와 회복순서가 기독교 예배의 형식과 내용 가운데 모두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자아의 깊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회복장치가 그대로 외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가 행하고 있는 예배라는 것이다. 놀라운 일 아닌가? 눈으로 보이지 않은 채 자아 안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회복장치가 눈으로 보이도록 형식화된 것이 바로 예배이다. 회복장치와 예배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c. 영광(Glory)
우리는 이제 회복장치의 맨 마지막 과정에 와 있다. 사고와 의지가 마지막으로 연합되어서 만들어지는 현상은 영광이다. 하나님을 향한 영광이다. 사고가 의식한 내용은 하나님의 영생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많이 있다. 전지성, 전능성, 영원성, 불변성, 무한성, 유일성, 자존성, 거룩성, 등등. 그 가운데 하나님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영원성(영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성에 반응해서 의지가 선택한 행동은 예배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묵상하는 모든 표현들이 예배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아가 하나님의 속성에 반응해서 예배하는 것을 한 단어로 표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영광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Deep Bang 사건 이후로 인간에게 가장 받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표현하는 하나님을 향한 영광일 것일 것이다. 자아가 존재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향한 영광에 있다 고 하겠다.(이사야43:7절,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따라서 자아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표현하는 행위는 자아의 회복 과정의 마침표와 같다. 돌려서 생각해보면, Deep Bang 사건 이전의 자아의 존재 이유도 역시 하나님을 향한 영광이다. 자아 최초의 모습으로, 그리고 완벽히 회복된 자아의 모습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영광을 표현하는 자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