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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잿더미에서 세 번 부활한 불사조
등소평 : 삼상삼하(三上三下) - 세 번 내려가고 세 번 올라가다
DATE 08-06-20 10:49
글쓴이 : 이호      
중국인들의 언어관습에 탁월한 점이 있다. 사자성어(四字成語)라는 것이다. 복잡하고 방대한 현상을 한 장면으로 포착하여 네글자로 표현해내는 솜씨를 보면 절로 감탄하게 된다.
등소평의 일생을 요약한 단어 역시 그렇다 : 삼상삼하(三上三下). 이 경우에는 ‘삼하’부터 해석하는 쪽이 그의 일생에 들어맞는다. 세 번 내려갔지만 기어코 세 번 다시 올라갔다. 하버드의 교수 로스 테릴의 표현을 빌자면 ‘세번이나 치욕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부활’했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멋지게 묘사한 단면이다.
1933년 첫 번째 실각의 명목상의 이유는 패전이었다. 등소평은 국민당의 공격 앞에서 후퇴했고, 단순방어에 그쳤다는 죄목으로 직책을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 하지만 어느 인간 집단이나 속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내면적인 이유는 중국 공산당 내의 국제파와 국내파의 대립이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유학파 28인은 소련의 방식을 따라 도시를 거점으로 혁명을 전개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모택동을 비롯한 국내파들은 중국 실정에 맞추어 ‘농촌이 도시를 포위한다’는 게릴라 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실용주의자였으며 모택동의 지지자였던 등소평은 국내파의 노선을 따르고 있었고, 결국 그들과 함께 처단되었다.
떠나간 아내와 배신한 친구
1차 실각은 정치적인 시련이었을 뿐 아니라 인간적인 쓰라림이기도 했다. 벤자민 양의 묘사다.
“아내가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그의 죄목을 폭로하면서 모든 관계를 끊겠노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광경을 볼 때 그의 심정은 몹시 괴로웠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등소평을 비판하는 모임과 군중대회를 몇 번씩 주재했던 이유한(리웨이한)의 품에 안겼다.”
아내의 재혼상대는 그의 유학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후일 등의 아내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자신을 버린 아내와 배신한 친구 사이에는 아들이 있었다. 등소평은 그 아들을 끝까지 보살피는 감동적인 아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역시 큰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2차 실각은 1969년, 악명높은 문화대혁명의 광풍과 함께 닥쳐왔다. 사회주의 이상에만 사로잡힌 모택동은 단기간에 자본주의 선진국들을 따라잡겠다는 야심으로 대약진 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삼천만이 넘는 농민들이 굶어서 죽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지도자가 유소기(류사오치)와 등소평이다. 그들의 실용주의적인 정책으로 경제는 회복되고 인민들은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잘못한 것만 문제가 된다면 인간세상이 아니라 천사들의 모임일 것이다. 잘했는데도 문제가 되기에 세상이 시끄럽고 인생 살이이 어렵다. 최고 지도자가 저지른 비참한 실패를 2인자 그룹에서 극복해버렸으니, 문제가 안될 수 없다. 모택동은 공산당의 리더라기 보다는 고대 전제국가의 황제와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라이벌로 등장한 유소기를 죽음의 길로, 등소평을 유배길로 보내버렸다.
삼년하방(三年下枋)과 천안문 사태
최고 지도자 그룹에 속해있던 등소평은 하루 아침에 시골의 트랙터 공장 노동자로 전락했다. 줄질을 하며 보내던 삼년간, 이번에도 역시 인간적인 비극을 겪어야 했다. 홍위병의 고문을 받던 큰아들이 건물 창밖으로 뛰어내려 하반신 불구가 된 것이다. 그래도 등소평의 용기는 꺽이지 않았다.
큰 딸은 이 시기의 등소평이 마당을 걷던 장면을 기억한다. “아버지의 단호하고 빠른 걸음을 쳐다보면서 아버지의 신념, 사상, 결의가 점점 뚜렷하고 확고해진다고, 앞날의 투쟁에 대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나 혼자 생각했다.” 훗날의 역사를 살펴볼 때 딸은 아버지를 제대로 읽었다.
3차 실각은 1976년 등소평의 평생에 걸친 후원자였던 주은래의 죽음과 함께 왔다. 사건은 아주 작은 발단으로부터 시작했다. 누군가 천안문 광장에 마련된 빈소에 조그만 분홍빛 장미다발을 놓고 갔다. 그후로 꽃다발은 점점 많아져서 며칠만에 수천개가 되었다.
동시에 죽은 자를 애도하기 위해 모인 군중이 순식간에 살아있는 자들에게 항거하는 시위대로 변모했다. 공산당이 강경 무력 진압을 선택함으로써 유혈극이 진행되었다. 대만과 서방 언론에서 한 때 사망자가 5만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던 제 1차 천안문 사태다.
모택동이 유혈사태의 책임을 뒤집어 씌운 대상이 바로 등소평이었다. 이미 칠십을 넘긴 그는 일체의 직위를 박탈당하는 생애 마지막 치욕을 겪었다.
삼상삼하의 비결
세 번이나 굴욕적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쫓겨났다가 다시 살아나서 마침내 대권을 움켜쥐고 역사와 운명을 바꿔버린 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 외적으로는 능력을 들 수 있다. 국민당과의 내전, 굶주림의 문제, 문화 대혁명의 폐허로부터의 재건 등 수십년간에 걸친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줄 능력을 계속해서 입중해보인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반대자들은 등소평을 핍박하면서도 그를 살려둘 수 밖에 없었다.
내적으로는 인내심과 낙천적인 성격이다. 등소평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중국의 원세개(위안스카이)와 소련의 흐루시초프는 권좌에서 밀려난 뒤 홧병으로 죽었고 장청은 자살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더 고통스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견뎌냈다. 그가 딸에게 말했듯이, 어떤 상황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쓰라림을 삼키는 일’을 반복하면서 인내했다. 실력을 쌓아가며 희망을 갖고 끝까지 견디는 것, 작은 거인의 생애가 남긴, 진부하게 들리는 결론이다.
만들어낸 쇠들이 최첨단 장비와 기술을 갖춘 선진국의 제철소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철강들보다 우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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