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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는 세계에 희망을 채운 사람들
세계를 움직이는 ‘뉴스 피플’ (5)
DATE 08-08-22 13:33
글쓴이 : 문경화      
“한편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는 다른 목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세계는 자신의 뜨거운 열정의 불꽃 속에서 연소되어 사라질 것이며, 그 재로부터 밝은 희망으로 가득 찬, 새롭고 보다 젊음이 넘치는 세계가 아침 햇살을 눈가에 머금은 채 나타날 것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진실은 진실한 행동에서만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고 선언했다.
사회가 민주화될 때, 즉 국민을 강제로 통제하고 소외 시키기 힘들 때 엘리트 집단은 선전이란 방법을 동원한다.
홍보와 광고, 영화, 텔레비전 등을 운영하는 주된 목표는 바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인위적인 욕구’를 만들어내어, 대중이 그 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결과 대중은 소외되어 간다.
여기 전쟁 중에 그리고 현재까지 인간을 소외하는 선전 선동에 저항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을 소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인간의 존엄만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것임을 위해 드러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우리의 투쟁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다”
윈스턴 처칠
 
처질은 온갖 병마와 작은 사고로 고통 받으면서도 아흔 살까지 천수를 누렸다. 1955년 영국 수상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그의 나이는 여든 한 살이었다.
처칠은 당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파시즘으로부터 세계를 구한 세계 최고의 정치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1950년대에 들어 서면서 그는 아무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위대한 역사 그 자체’로 대우 받았고 사람들은 그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성공한 정치인이 되기에는 결점이 너무 많았다. 학벌도, 지역적 기반도, 믿고 따르는 지지 세력도, 모아 놓은 재산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자신을 미워하거나 비하하지 않았다.
아내를 제외하고는 주변 사람들 중에서 그에게 정신적으로 힘이 되어준 사람도 없었다.
부모는 그를 한심하게 생각했으며, 선생님이나 학교 동창들도 그저 공부 못하는 고집생이 외톨이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처칠이 뒤늦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능력과 운명을 믿었기에 자기 행복이나 성공의 기준을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맡겨 두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은 여론을 따르지만, 영웅은 여론을 만든다.
1940년 처칠은 예순여섯 살이 되었다. 그때까지의 인생은 그야말로 실패였다. 정치적으로는 벌써 10년째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빚더미에 앉아 있었다.
학력도, 건강도, 대인관계도 좋지 않았던 처칠에게 가장 중요한 강점 하나가 있었으니, 한번 세운 목표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 주재 미국 대사인 조셉 케네디도 영국이 곧 독일에 항복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할 정도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좋은 뉴스가 없었다. 유럽 전선에서는 독일이 연전연승하고 있었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함락했으며 심지어 믿고 있었던 영국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마저도 침몰되었다.
연일 계속되는 포격과 패전소식으로 국민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밝은 미래를 보여 주는 처칠의 연설은 한 줄기 구원의 약속이 되었다.
마침 독일 선전을 ‘선전의 귀신’으로 불리던 선전부 장관 괴벨스가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결코 직접 라디오 방송을 하지는 않았다. 이는 지도자는 대중에게 신비스러운 존재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 독일이 위기에 처하여 국민들이 고통을 겪을 때에도 총통이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처칠과 히틀러는 리더십에서 큰 차이를 나타낸다.
늘 냉정한 카리스마를 유지했던 히틀러와는 달리 처칠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있는 국민들 앞에 서서 힘과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당시 모든 가정이 시간에 맞춰 처칠의 라디오 연설을 들었는데, 1941년경에는 성인 인구의 70 퍼센트가 정기적인 청취자였다고 한다. 국민들은 그의 연설을 들으며 마치 무엇엔가 홀린 듯, 어려운 시절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오리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영국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매우 희박했다.
처칠은 조금만 기다리면 곧 미국이 참전하리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자신도 방송을 통해 주요 사안을 꾸준히 국민들에게 알리고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가 처칠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영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역사적 사명감도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치 독일과의 전쟁이 단순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영토 전쟁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생사가 달려있는 중요한 전쟁임을 역설했다.
나치는 증오와 폭력으로 이뤄진 악의 집단이므로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고 반드시 승리해야 하며, 그러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전쟁에 참여하는 영국 극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영웅이라고 말했다.
국민들은 그 전쟁이 과거 제국죽의 영토분쟁과는 다른 인류 역사의 흐름을 영원히 바꿔 놓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각자가 전 세계를 나치로부터 구하기 위해 역사적인 전쟁을 치르는 영웅이라는 것을 차츰 깨달았고, 그러기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야만이 아닌 문명의 방식으로 답하라”
아웅산 수지
 
아웅산 수지는 1945년 6월 19일 미얀마의 독립운동 영웅 아웅산 장군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던 미얀마를 일본의 힘을 빌어 독립시키고 일본이 다시 미얀마를 정복하려고 하자 연합군의 힘을 빌어 일본을 몰아내 미얀마를 독립 국가로 만들어 낸 주인공이다.
아웅산은 1947년 7월 19일, 미얀마의 독립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암살자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때 아웅산 수지의 나이 겨우 두 살이었다. 아웅산 수지는 비록 아버지를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후에 아버지의 삶을 연구하고 아버지의 미얀마에 대한 사심 없는 사랑, 신념 등을 존경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학업을 마친 수지는 1964년 영국으로 유학,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했다. 수지는 옥스퍼드에 진학해서도 아버지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레서인지 그녀는 혈통에 관한 강한 자부심을 보였다고 한다.
아웅산 수지는 대학을 1967년에 졸업하고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일을 하다가 옥스퍼드 대학 시절, 급우였던 영국이 마이클 아리스를 부탄에서 다시 만나 그와 72년에 결혼했다.
1988년 아웅산 수지는 본격적으로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게 된 되었는데 이때 미얀마에서는 3월과 6월, 그리고 8월에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 시위에는 군가정부가 무자비한 진압을 펼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연행되고 일부 시위자들이 해외로 망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아웅산 수지가 어머니 도 킨지 여사의 건강 악화로 미얀마에 귀국하게 된 때는 공교롭게도 3월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잠잠해지고 6월의 시위가 준비되던 4월이었다.
당시 미얀마는 3월 시위 이후 극도의 혼란 속에 있었고 수지는 그 혼란을 직접 몸으로 느꼈으며 6월 시위 때 군사정권의 무자비한 진압을 목도하게 되었다.
아웅산 수지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국민민주동맹 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를 9월 24일 결성하고 군사정부의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 SLORC(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를 향한 끊임없는 저항을 했다. 그 결과 군사정권은 그녀를 1989년 7월 20일 가택연금 시켰다.
1990년 5월 27일, 수많은 정당들이 난립한 사운데 그리고 아웅산 수지가 억류된 상태에서 미얀마의 총선이 실시되었다. NLD는 총선에서 실질적인 당수인 수지가 연금 상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의석의 80%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결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정권 이양을 주장했던 SLORC에게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때문에 SLORC는 기존의 자기 주장을 번복하고 총선 결과를 인정치 않았으며 정권도 이양하지 않았다. 그 결과 미얀마는 오늘까지 군부가 권력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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