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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작가 박경리,편히 잠들다”
큰 별이 진 자리는 아름답다.
DATE 08-05-09 09:32
글쓴이 : 문경화      
 

 

 

“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토지’에 나오는 인물 같은 평사리 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의 향기뿐 아무것도 없다. 충격과 감동, 서러움은 뜬구름 같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같이 사라져버렸다.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 ‘토지’의 서문 일부

 


대하소설 ‘토지’를 쓴 원로 작가 박경리씨(82)가 5일 오후 3시께 별세했다. 지난해 7월 폐에 종양이 발견됐으나 고령을 이유로 본인이 치료를 거부한 채 요양해오다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5년에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 백백(黑黑白白)’을 <현대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단편 ‘전도(剪刀)’, ‘불신시대(不信時代)’, ‘벽지(僻地)’ 등을 발표하고, 이어 1962년 장편 ‘김 약국의 딸들’을 비롯하여 ‘시장과 전장’, ‘파시(波市)’ 등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들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9년 6월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994년에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 ‘토지(土地)’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 과정에 걸쳐 여러 계층의 인간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영어·일본어·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호평을 받았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등을 수상하였고,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주최한 20세기를 빛낸 예술인(문학)에 선정되었다.

6·25전쟁 때 남편이 납북되었으며 시인 김지하가 사위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5일장으로 치러진다. 장지는 경남 통영이다.



박경리 선생의 옛 집에 조성된 공원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오봉산 기슭에 위치한 토지문화관은 환경과 생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터전 역할을 해왔다.

박 씨의 자택과 울타리를 맞댄 곳에 토지문화관이 있다. 이곳에는 세련되게 만든 회의실과 세미나실이 있어서 예술단체나 대학교에서 빌려 쓰곤 한다. 하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창작실’이다.

2001년 이 ‘창작실’이 문을 연 뒤로 이곳을 찾았던 문인과 예술가들은 박완서 강석경 박범신씨 등 80명이 넘는다. 박경리 씨는 “이들의 작업을 돕기 위해 나 또한 문예진흥원과 강원도의 도움을 받는다”고 말했다. 박 씨의 외손자인 김원보 씨도 이곳에서 작업을 했다. 김 씨는 인터넷 소설 ‘엑시드맨’을 책으로 펴내기 위해 몇 년째 작업 중이다. 박 씨는 김 씨의 소설을 읽고 평을 해주곤 하지만 “외손자라고 봐주면서 조언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었다.

“저는 작가들 잘 안 만납니다. 제 할 일 하고, 그 사람들 할 일 합니다. 누가 들어왔는지, 나가는지 잘 모릅니다. 인사도 못하게 하니까, 처음에는 섭섭해 할 거예요. 하지만 나중에는 이게 더 편하구나 하는 걸 알 게 됩니다. 서로가 자유로워야지 글이 나오니까요.”

박 씨는 이들을 위해 밭 500평을 손수 일구기도 했다.

채소를 가꾸다가 벌레에 물리기도 하고, 독초에 베이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숲에서 일하다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다. 1주일에 한 번씩은 재래시장인 원주시내 중앙시장을 찾아가 돼지고기와 닭, 생선, 오징어 같은 작가들의 먹을거리를 사오기도 했다.

박경리 씨는 문학적인 성과 외에도 환경과 생태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활동으로도 의미 있는 자취를 남겼다.

생명 하나하나의 존엄성이 존중돼야 한다는 생명사상은 '토지'를 비롯한 박 씨의 여러 작품 속에서 엿보이며 이러한 그의 생명사상은 환경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좀처럼 단체의 대표 직책을 맡지 않았던 그였지만 1993년 환경운동연합 출범 당시 공동대표를 맡기도 할 정도였다.

2000년 청계천 복원을 꿈꾸던 학자들로 구성된 '청계천살리기연구회'가 토지문화관에서 청계천 복원 구상과 관련한 세미나를 개최했고 구상 단계에만 머물던 이 계획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걸면서 구체화됐다.

박씨는 2003년에 문학과 환경문제를 다루는 계간지 '숨소리'를 창간하기도 했으며 2004년에는 1995년부터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한 글로 엮은 환경 에세이집 '생명의 아픔'(이룸)도 출간했다.

 
 
 
 
 
 

                              

큰 별이 진자리는 아름답다.

 


                                                                                                  문 경화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가 <현대문학>을 통해 처음 세상에 태어난 해에, 나는 어머니의 몸을 통해 세상에 첫발을 내딛었다.

문학을 전공하셨던 어머니는 꿈 많던 여대생에서 모진 시집살이를 해야 하는 새댁으로의 변화가 마음에 큰 부담이 되셨던가 보다. 첫 딸인 내가 태어나고도 어머니는 내게 젖을 먹이시면서 다달이 배달되는 <현대문학>속의 ‘토지’를 읽고 또 읽으셨다고 한다.

“아이들이 사탕을 아껴먹듯이 난 그 책을 아껴서 읽곤 했지. 다 읽고 나면 너무 아쉬워서 다음 달을 기다리는 일이 너무 멀게 느껴졌었단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던 그 말의 의미를 어릴 적엔 잘 알지 못했다. 문학이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시간의 속도를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낳아주신 어머니와 세상이라는 커다란 바다로 이끌어주신 문학의 어머니가 함께 들려주시는 ‘토지’를 자장가 삼아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평사리 속을 거니는 꿈을 꾸며 때론 월선이와 용이의 애절한 사랑으로, 때론 몰락한 최 씨 집안을 일으키는 서희의 서늘한 다짐으로 손을 꼭 쥐면서…….

그러나 어린 시절 나는, 글을 팔아 살아가며 그 일이 너무 외롭고 힘들지라도 글과 함께 내 생애가 끝나기를 바라게 될 것이라고 믿어본 적이 없었다.

그 슬프고도 운명적인 바람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강렬해졌는데 비루하고 남루한 세상에서 단 하나의 위안과 꿈이 되는 문학을 위해 나는, 더 이상의 것들이나 다른 것들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먼 길을 돌아오면서 말이다.

재봉틀을 믿고 ‘토지’에 전념하셨다는 박경리 선생님. 실패하면 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할지언정 문학에 타협은 없다던 그 분이 가신 길이 눈물 나게 아름답다.

굴곡진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신 박경리 선생님은 나의 어머니와 내게 큰 위안과 좌표가 되었다. 아니 대한민국의 모든 딸들에게, 또한 모든 아들들에게 대지에 부는 따뜻한 바람이 되어 시린 인생의 등대가 되셨다.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까지 잃으신 뒤 하나뿐인 사위, 시인 김지하의 어려운 수배 생활과 감옥살이까지 감당하면서도 한국 문학의 거목이 되신 것은, 권위적이고 비인간적인 한국사에서 단 하나의 등불처럼 빛났던 것이다.

이제 시공을 초월한 위대한 이야기들을 뒤로 하시고 더 아름답고 더 평화로운 곳으로 박경리 선생님은 가셨다.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그 말을 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의 자랑스러움, 한국어로 쓴다는 것의 무한함에 대해.

그리고 올 곧게 한 길을 간다는 것에 대한 뼈아픈 자기극복에 대해서 말이다.

이제 선생님을 떠나보내면서 많은 짐들을 우리는 나누어가져야 한다. 멀리서 환하게 웃으시며 편히 쉬실 선생님의 미소를 위해……. 그 아름다운 선생님의 언어들을 지키기 위해…….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시편 (2008년 4월 '현대문학'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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